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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리빙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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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1813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탐험가이자 선교사로, 아프리카 내륙 탐험과 노예 무역 반대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런던 선교회의 의료 선교사로 아프리카에 파견되어 보츠와나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으며, 칼라하리 사막 횡단, 느가미 호 발견, 잠베지 강 발견, 빅토리아 폭포 발견 등 지리적 발견에도 기여했다. 리빙스턴은 노예 무역의 참상을 알리고 폐지를 주장했지만, 아프리카 식민지화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의 삶은 한국 개신교에도 큰 영향을 미쳐, 한국 교회는 아프리카 선교에 헌신하고 있으며, 리빙스턴을 기리는 기념 사업도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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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리빙스턴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존칭목사
이름데이비드 리빙스턴
로마자 표기David Livingstone
출생일1813년 3월 19일
출생지스코틀랜드 사우스래너크셔 블랜타이어
사망일1873년 5월 1일
사망지잠비아 북부 주 카젬베 왕국 치탐보 마을
안장 장소웨스트민스터 사원
안장 장소 좌표51.499444, -0.1275
서명
주요 업적기독교 포교, 아프리카 탐험, 헨리 모턴 스탠리와의 만남
가족
배우자메리 모팻 (1845년 1월 결혼, 1862년 4월 27일 사별)
자녀6명
경력
직업중앙 아프리카 탐험가,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 겸임교수
종교
종교회중 교회
소속 교회스코틀랜드 조합교회
훈장
훈장
기타

2. 생애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1813년 3월 19일 스코틀랜드의 방직 공장 마을 블랜타이어에서 태어났다.[5]

리빙스턴의 출생지, 블랜타이어, 사우스 래너크셔, 스코틀랜드
그는 네일 리빙스턴과 아그네스 헌터 사이에서 태어난 일곱 자녀 중 둘째였다. 열 살 때부터 블랜타이어 공장에서 형 존과 함께 하루 14시간 동안 피서로 일하며 방적기에 끊어진 면실을 이었다.[5]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출생지, 당시 가구들과 함께


어린 시절, 리빙스턴은 주일학교 교사이자 금주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기독교 전도지를 나눠주고, 신학, 여행, 선교 사업에 관한 책을 읽으며 성장했다.[5] 그는 독서를 즐겼지만, 동시에 현지 석회석 채석장에서 동물, 식물, 지질 표본을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아버지의 신학 책 강요에도 불구하고, 리빙스턴은 자연과 과학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탐구했다.[6] 1832년, 토마스 딕의 ''미래 국가의 철학''을 읽고 신앙과 과학을 조화시키는 논리를 발견했다.[6] 블랜타이어의 복음 전도자 토마스 버크와 주일학교 교사 데이비드 호그도 리빙스턴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6] 15세에 스코틀랜드 교회를 떠나 랄프 워드로의 영향을 받아 지역 독립 교회에 합류, 예정론적 구원 제한을 부정하고, 부흥주의적 가르침을 받아들였다.[7]

리빙스턴은 선교사 칼 퀴츨라프의 ''중국을 위해 영국과 미국의 교회에 호소''를 읽고 의학 공부가 선교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 아버지를 설득했다.[7] 1836년 글래스고의 앤더슨 대학교에 입학하여 의학과 화학을 공부하고, 개혁교회 신학교에서 신학 강좌를 수강했으며, 그리스어를 공부했을 가능성도 있다.[8][9] 또한, 지역의 로마 가톨릭 신자였던 다니엘 갤러거에게 라틴어 개인 지도를 받았다.[10] 리빙스턴은 앤드류 부캐넌과 제임스 영과 같은 평생 친구들을 사귀었다.[8]

1837년 런던 선교회(LMS)에 지원하여, 1838년 수습 후보로 합격, 온가에서 예비 훈련을 받았다.[6] 리처드 세실 목사에게서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및 신학 교육을 받았고, 1839년 LMS 이사회는 리빙스턴의 런던 의학 공부 지원 요청을 받아들였다.[6] 차링크로스 병원 의과대학에서 의학, 산과학, 식물학 과정을 이수하며 의학 공부를 계속했다.[6]

1840년 11월 16일 글래스고 의사 및 외과 대학의 면허를 취득하고,[11] 11월 20일 알비온 채플에서 목사로 임직되었다.[12]

1813년 스코틀랜드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태어난 리빙스턴은 를 파는 행상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적 부터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선교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90] 그는 중국 의료선교사를 꿈꾸며 방적공장에서 일하면서 독학으로 글래스고의 앤더슨 대학교에서 신학의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아편 전쟁으로 인해 중국으로 가는 길이 막히게 되었다.

21세 때, 리빙스턴은 구츠라프의 중국 선교사 요청이 담긴 팜플렛을 접하고, 런던 선교회(LMS)에 지원하여 선교사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1838년 8월, 그는 온가에서 리처드 세실 목사에게서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및 신학 교육을 받았다. 세실 목사는 리빙스턴의 "지성과 조용한 활력", 온화한 성품과 훌륭한 인격을 높이 평가했다.[8][9]

이후 리빙스턴은 차링크로스 병원 의과대학에서 의학, 산과학, 식물학을 포함한 임상 훈련 과정을 이수하며 의학 공부를 계속했다.[8] 1840년 11월 16일, 그는 글래스고 의사 및 외과 대학의 면허를 취득하고,[11] 알비온 채플에서 목사로 임직되었다.[12]

줄루족 춤, 잠베지 강의 슈팡가에서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조공을 받기 위해


당초 리빙스턴은 중국 선교를 희망했지만, 아편전쟁 발발 가능성으로 인해 LMS 이사회는 선교사 파견을 주저했다. 그는 서인도 제도에서 사역하기를 바라는 LMS의 뜻을 전달받았지만, 정착된 목회보다는 다른 지역에 더 끌린다고 답했다.[13] 결국 그는 런던에서 선교사 로버트 모팻을 만나 아프리카 선교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고, 아프리카로 선교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6] 모팻은 리빙스턴에게 "선교사가 단 한 명도 가본 적 없는 북쪽의 광활한 평야"를 언급하며 아프리카 선교의 가능성을 제시했다.[6] 리빙스턴은 모팻의 비전과 더불어, 기독교와 상업을 통한 아프리카 노예 무역 종식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깊이 공감하며 아프리카 선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7]

1840년 런던 전도 협회의 의료 전도사로서 로버트 모펫의 영향으로 아프리카로 떠난[6] 리빙스턴은, 1841년 남아프리카 보츠와나에 도착하여 니그로 부락에서 복음 전도와 원주민 문화 연구를 시작하였다.[14] 그는 베추아날랜드 북쪽으로 선교 사업을 확장하려는 모팻의 비전과 기독교, 상업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졌다.[7]

1841년 3월 15일, 배는 사이먼스 만에 도착했고, 리빙스턴은 필립과 함께 케이프타운에 머물렀다. 필립은 보어인과 영국 정착민과의 분쟁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정책을 유지했다.[13]

1841년 5월 19일부터 7월 31일까지 소달구지를 타고 쿠루만 선교부까지 이동했다. 9월부터 12월 말까지는 장인 선교사 로저 에드워즈와 함께 750마일을 여행하며 새로운 선교부를 위한 잠재력을 조사했다.[14] 1843년 6월, 에드워즈와 함께 마보츠아에 선교부를 설립하고 시설 건설에 참여했다.[15]

메발웨가 사격하여 리빙스턴을 제압한 사자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모습


스코틀랜드 블랜타이어에 있는 리빙스턴 기념 조각


1844년 1월, 바알 강에 도착한 모팻 부부를 만나러 간 리빙스턴은 처음으로 메리를 만났다.[18] 2월 16일, 마보츠아 마을 주민들의 가축을 공격하는 사자를 막던 중, 리빙스턴은 왼팔을 크게 다쳤다. 이때 메발웨가 사자를 쏘려고 주의를 돌려 리빙스턴의 목숨을 구했다.[16] 이후 쿠루만에서 회복하는 동안 메리가 그를 돌보았고, 그들은 약혼했다.[6]

1845년 1월 9일 리빙스턴과 메리는 결혼했다.[18] 리빙스턴은 동료 선교사 로저스 에드워즈와의 불화와 바크가틀라족의 무관심으로 인해 1845년 마보츠아를 떠났다.[19] 1847년에는 가뭄, 보어인의 근접성, 그리고 "저 너머 지역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초누아네를 버렸다.[19] 콜로벵 선교부에서 2년간 노력한 끝에 1849년 세셀레 추장을 개종시켰으나, 몇 달 후 세셀레는 개종을 포기했다.[19]

리빙스턴은 원주민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부족민들을 기독교로 영구적으로 개종시키지는 못했다. 세켈레는 강우 의식과 일부다처제를 계속 유지했다.[36]

리빙스턴은 영국 제국의 확장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그것은 그의 가족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었다.[54] 1845년, 그는 로버트 모팻의 딸 메리와 결혼했다.[54]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자녀들은 아버지 없이 자랐고, 아내 메리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으며, 결국 1862년 4월 27일에 말라리아로 사망했다.[54]

그에게는 여섯 명의 자녀가 있었다. 로버트는 미국 남북 전쟁 중 북군에서 복무하던 중 사망했다.[55] 애그니스는 1912년에 사망했으며, 부유한 스코틀랜드 양조장 경영자 A.L. 브루스와 결혼했다. 토마스는 1876년 이집트에서 27세의 나이로 아프리카에서 어린 시절 걸린 빌하르치아병으로 사망했다. 엘리자베스는 두 달 만에 사망했다. 윌리엄 오스웰은 1851년에 태어나 1892년 트리니다드에서 의사로 일하다 사망했다. 안나 메리는 1858년 출생, 1939년 사망했다.

애그니스, 윌리엄 오스웰, 안나 메리만이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58] 그의 말년 후회 중 하나는 자녀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었다.[59]

2. 1. 어린 시절과 교육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1813년 3월 19일 스코틀랜드의 방직 공장 마을 블랜타이어에서 태어났다.[5] 그는 네일 리빙스턴과 아그네스 헌터 사이에서 태어난 일곱 자녀 중 둘째였다. 열 살 때부터 블랜타이어 공장에서 형 존과 함께 하루 14시간 동안 피서로 일하며 방적기에 끊어진 면실을 이었다.[5]

어린 시절, 리빙스턴은 주일학교 교사이자 금주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기독교 전도지를 나눠주고, 신학, 여행, 선교 사업에 관한 책을 읽으며 성장했다.[5] 그는 독서를 즐겼지만, 동시에 현지 석회석 채석장에서 동물, 식물, 지질 표본을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아버지의 신학 책 강요에도 불구하고, 리빙스턴은 자연과 과학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탐구했다.[6] 1832년, 토마스 딕의 ''미래 국가의 철학''을 읽고 신앙과 과학을 조화시키는 논리를 발견했다.[6] 블랜타이어의 복음 전도자 토마스 버크와 주일학교 교사 데이비드 호그도 리빙스턴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6] 15세에 스코틀랜드 교회를 떠나 랄프 워드로의 영향을 받아 지역 독립 교회에 합류, 예정론적 구원 제한을 부정하고, 부흥주의적 가르침을 받아들였다.[7]

리빙스턴은 선교사 칼 퀴츨라프의 ''중국을 위해 영국과 미국의 교회에 호소''를 읽고 의학 공부가 선교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 아버지를 설득했다.[7] 1836년 글래스고의 앤더슨 대학교에 입학하여 의학과 화학을 공부하고, 개혁교회 신학교에서 신학 강좌를 수강했으며, 그리스어를 공부했을 가능성도 있다.[8][9] 또한, 지역의 로마 가톨릭 신자였던 다니엘 갤러거에게 라틴어 개인 지도를 받았다.[10] 리빙스턴은 앤드류 부캐넌과 제임스 영과 같은 평생 친구들을 사귀었다.[8]

1837년 런던 선교회(LMS)에 지원하여, 1838년 수습 후보로 합격, 온가에서 예비 훈련을 받았다.[6] 리처드 세실 목사에게서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및 신학 교육을 받았고, 1839년 LMS 이사회는 리빙스턴의 런던 의학 공부 지원 요청을 받아들였다.[6] 차링크로스 병원 의과대학에서 의학, 산과학, 식물학 과정을 이수하며 의학 공부를 계속했다.[6]

1840년 11월 16일 글래스고 의사 및 외과 대학의 면허를 취득하고,[11] 11월 20일 알비온 채플에서 목사로 임직되었다.[12]

2. 2. 선교사로서의 준비

1813년 스코틀랜드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태어난 리빙스턴은 를 파는 행상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적 부터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선교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90] 그는 중국 의료선교사를 꿈꾸며 방적공장에서 일하면서 독학으로 글래스고의 앤더슨 대학교에서 신학의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아편 전쟁으로 인해 중국으로 가는 길이 막히게 되었다.

21세 때, 리빙스턴은 구츠라프의 중국 선교사 요청이 담긴 팜플렛을 접하고, 런던 선교회(LMS)에 지원하여 선교사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1838년 8월, 그는 온가에서 리처드 세실 목사에게서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및 신학 교육을 받았다. 세실 목사는 리빙스턴의 "지성과 조용한 활력", 온화한 성품과 훌륭한 인격을 높이 평가했다.[8][9]

이후 리빙스턴은 차링크로스 병원 의과대학에서 의학, 산과학, 식물학을 포함한 임상 훈련 과정을 이수하며 의학 공부를 계속했다.[8] 1840년 11월 16일, 그는 글래스고 의사 및 외과 대학의 면허를 취득하고,[11] 알비온 채플에서 목사로 임직되었다.[12]

당초 리빙스턴은 중국 선교를 희망했지만, 아편전쟁 발발 가능성으로 인해 LMS 이사회는 선교사 파견을 주저했다. 그는 서인도 제도에서 사역하기를 바라는 LMS의 뜻을 전달받았지만, 정착된 목회보다는 다른 지역에 더 끌린다고 답했다.[13] 결국 그는 런던에서 선교사 로버트 모팻을 만나 아프리카 선교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고, 아프리카로 선교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6] 모팻은 리빙스턴에게 "선교사가 단 한 명도 가본 적 없는 북쪽의 광활한 평야"를 언급하며 아프리카 선교의 가능성을 제시했다.[6] 리빙스턴은 모팻의 비전과 더불어, 기독교와 상업을 통한 아프리카 노예 무역 종식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깊이 공감하며 아프리카 선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7]

2. 3. 아프리카로의 첫걸음

1840년 런던 전도 협회의 의료 전도사로서 로버트 모펫의 영향으로 아프리카로 떠난[6] 리빙스턴은, 1841년 남아프리카 보츠와나에 도착하여 니그로 부락에서 복음 전도와 원주민 문화 연구를 시작하였다.[14] 그는 베추아날랜드 북쪽으로 선교 사업을 확장하려는 모팻의 비전과 기독교, 상업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졌다.[7]

1841년 3월 15일, 배는 사이먼스 만에 도착했고, 리빙스턴은 필립과 함께 케이프타운에 머물렀다. 필립은 보어인과 영국 정착민과의 분쟁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정책을 유지했다.[13]

1841년 5월 19일부터 7월 31일까지 소달구지를 타고 쿠루만 선교부까지 이동했다. 9월부터 12월 말까지는 장인 선교사 로저 에드워즈와 함께 750마일을 여행하며 새로운 선교부를 위한 잠재력을 조사했다.[14] 1843년 6월, 에드워즈와 함께 마보츠아에 선교부를 설립하고 시설 건설에 참여했다.[15]

1844년 1월, 바알 강에 도착한 모팻 부부를 만나러 간 리빙스턴은 처음으로 메리를 만났다.[18] 2월 16일, 마보츠아 마을 주민들의 가축을 공격하는 사자를 막던 중, 리빙스턴은 왼팔을 크게 다쳤다. 이때 메발웨가 사자를 쏘려고 주의를 돌려 리빙스턴의 목숨을 구했다.[16] 이후 쿠루만에서 회복하는 동안 메리가 그를 돌보았고, 그들은 약혼했다.[6]

1845년 1월 9일 리빙스턴과 메리는 결혼했다.[18] 리빙스턴은 동료 선교사 로저스 에드워즈와의 불화와 바크가틀라족의 무관심으로 인해 1845년 마보츠아를 떠났다.[19] 1847년에는 가뭄, 보어인의 근접성, 그리고 "저 너머 지역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초누아네를 버렸다.[19] 콜로벵 선교부에서 2년간 노력한 끝에 1849년 세셀레 추장을 개종시켰으나, 몇 달 후 세셀레는 개종을 포기했다.[19]

리빙스턴은 원주민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부족민들을 기독교로 영구적으로 개종시키지는 못했다. 세켈레는 강우 의식과 일부다처제를 계속 유지했다.[36]

2. 4. 결혼과 가족

리빙스턴은 영국 제국의 확장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그것은 그의 가족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었다.[54] 1845년, 그는 로버트 모팻의 딸 메리와 결혼했다.[54]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자녀들은 아버지 없이 자랐고, 아내 메리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으며, 결국 1862년 4월 27일에 말라리아로 사망했다.[54]

그에게는 여섯 명의 자녀가 있었다. 로버트는 미국 남북 전쟁 중 북군에서 복무하던 중 사망했다.[55] 애그니스는 1912년에 사망했으며, 부유한 스코틀랜드 양조장 경영자 A.L. 브루스와 결혼했다. 토마스는 1876년 이집트에서 27세의 나이로 아프리카에서 어린 시절 걸린 빌하르치아병으로 사망했다. 엘리자베스는 두 달 만에 사망했다. 윌리엄 오스웰은 1851년에 태어나 1892년 트리니다드에서 의사로 일하다 사망했다. 안나 메리는 1858년 출생, 1939년 사망했다.

애그니스, 윌리엄 오스웰, 안나 메리만이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58] 그의 말년 후회 중 하나는 자녀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었다.[59]

3. 아프리카 탐험

로버트 모펫의 영향으로 1840년 런던 전도 협회의 의료 전도사로서 아프리카로 떠난 리빙스턴은, 1841년 남아프리카 보츠와나에 도착하여 복음 전도와 원주민 문화 연구를 시작하였다. 1849년부터 1856년까지 제1회 탐험을 시작하여 칼라하리 사막을 횡단하고, 1849년 느가미 호를 발견하였다. 1850년에는 왕립지리학회(Royal Geographical Society)로부터 '응가미 호(Lake Ngami)로의 여정'에 대한 크로노미터 시계(chronometer watch)를 받았다.[20] 1851년에는 "내륙의 열쇠"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잠베지 강에 도착했다.[23]

1852년, 가족을 영국으로 보낸 후, 리빙스턴은 대륙 동해안과 서해안의 중간쯤에 위치한 잠베지 강의 리냥티 마을로 북쪽으로 여행했다. 그곳에서 콜롤로족의 수장 세켈레투는 리빙스턴에게 해안으로 가는 무역로를 공동 조사할 권한을 부여했고, 27명의 콜롤로족 전사들이 통역과 안내를 맡았다. 그들은 심각한 어려움과 리빙스턴의 열병으로 인한 죽음 직전의 위기를 겪은 후 1854년 5월 대서양 연안의 루안다에 도착했다. 리빙스턴은 그 경로가 미래의 상인들에게는 너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리냥티로 되돌아왔다.[23]

같은 수장으로부터 빌린 114명의 콜롤로족 남성들과 함께 그는 잠베지 강을 따라 동쪽으로 향했다. 이 여정에서 그는 "천둥이 치는 연기"라는 뜻의 모시-오아-투냐 폭포를 최초로 본 유럽인이 되었고,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 폭포라고 명명했다.[23] 마침내 그는 잠베지 강의 대부분의 흐름을 지도에 담아 인도양 연안의 켈리마네에 성공적으로 도착했다.[23]

이로써 리빙스턴은 남중부 아프리카를 횡단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유명해졌고 아프리카를 "개척"한 것으로 칭송받았다.[23]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확립된 광역 무역로 네트워크가 존재했다.[23]

리빙스턴은 중앙 아프리카에 무역과 종교 선교를 설립할 것을 주장했지만, 테테의 포르투갈인과 킬와의 아랍 스와힐리인이 행한 아프리카 노예 무역의 폐지가 그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21] 그의 모토—"기독교, 상업, 문명"(Christianity, Commerce and Civilization)—은 현재 빅토리아 폭포의 그의 동상에 새겨져 있으며, 노예 무역의 대안을 형성하고 유럽인의 눈에 아프리카인들에게 존엄성을 부여하기를 바랐던 세 가지 요소의 결합이다.[21]

3. 1. 1차 탐험 (1849-1856)

로버트 모펫의 영향으로 1840년 런던 전도 협회의 의료 전도사로서 아프리카로 떠난 리빙스턴은, 1841년 남아프리카 보츠와나에 도착하여 복음 전도와 원주민 문화 연구를 시작하였다. 1849년부터 1856년까지 제1회 탐험을 시작하여 칼라하리 사막을 횡단하고, 1849년 느가미 호를 발견하였다. 1850년에는 왕립지리학회(Royal Geographical Society)로부터 '응가미 호(Lake Ngami)로의 여정'에 대한 크로노미터 시계(chronometer watch)를 받았다.[20] 1851년에는 "내륙의 열쇠"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잠베지 강에 도착했다.[23]

1852년, 가족을 영국으로 보낸 후, 리빙스턴은 대륙 동해안과 서해안의 중간쯤에 위치한 잠베지 강의 리냥티 마을로 북쪽으로 여행했다. 그곳에서 콜롤로족의 수장 세켈레투는 리빙스턴에게 해안으로 가는 무역로를 공동 조사할 권한을 부여했고, 27명의 콜롤로족 전사들이 통역과 안내를 맡았다. 그들은 심각한 어려움과 리빙스턴의 열병으로 인한 죽음 직전의 위기를 겪은 후 1854년 5월 대서양 연안의 루안다에 도착했다. 리빙스턴은 그 경로가 미래의 상인들에게는 너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리냥티로 되돌아왔다.[23]

같은 수장으로부터 빌린 114명의 콜롤로족 남성들과 함께 그는 잠베지 강을 따라 동쪽으로 향했다. 이 여정에서 그는 "천둥이 치는 연기"라는 뜻의 모시-오아-투냐 폭포를 최초로 본 유럽인이 되었고,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 폭포라고 명명했다.[23] 마침내 그는 잠베지 강의 대부분의 흐름을 지도에 담아 인도양 연안의 켈리마네에 성공적으로 도착했다.[23]

이로써 리빙스턴은 남중부 아프리카를 횡단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유명해졌고 아프리카를 "개척"한 것으로 칭송받았다.[23]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확립된 광역 무역로 네트워크가 존재했다.[23]

리빙스턴은 중앙 아프리카에 무역과 종교 선교를 설립할 것을 주장했지만, 테테의 포르투갈인과 킬와의 아랍 스와힐리인이 행한 아프리카 노예 무역의 폐지가 그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21] 그의 모토—"기독교, 상업, 문명"(Christianity, Commerce and Civilization)—은 현재 빅토리아 폭포의 그의 동상에 새겨져 있으며, 노예 무역의 대안을 형성하고 유럽인의 눈에 아프리카인들에게 존엄성을 부여하기를 바랐던 세 가지 요소의 결합이다.[21]

3. 2. 2차 탐험 (1858-1864)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1858년 켈리마네에서 영국 영사로 임명되어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2차 탐험을 시작했다.[24][25] 6명의 대원과 함께 잠베지 강 유역을 조사하던 중, 포르투갈인들의 노예 매매를 목격하고, 이에 간섭하여 수백 명의 노예를 해방시켰다.[23] 이 사건으로 포르투갈과 영국 간의 갈등이 발생하여 영국 정부는 리빙스턴에게 탐험 중지 명령을 내렸다.[23]

1857년 12월 외무부는 리빙스턴에게 대규모 탐험을 제안했고, 1858년 1월 그는 영국에서 급하게 모집된 6명의 전문 장교들과 함께 두 번째 잠베지 탐험을 이끌게 되었다.[23] 조립식 철제 강철 증기선 ''마 로버트(Ma Robert)''를 이용해 탐험을 진행했으나, 카호라 바사 급류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26] 탐험대원 간의 불화도 발생하여 화가 토마스 베인스가 해고되기도 했다.

노예 상인들과 사슬에 묶여 '길들이는 막대기'로 목걸이를 한 포로들. 리빙스턴의 ''서술(Narrative)''에서 발췌


탐험대는 니아사 호를 탐험하고, 1861년에는 중앙 아프리카 대학교 선교회(UMCA)의 찰스 맥켄지 주교가 시레 강에 새로운 선교부를 설립하는 것을 지원했다. 리빙스턴은 ''레이디 니아사(Lady Nyasa)''라는 새로운 강철 증기선을 건조했지만, 1862년 그의 아내 메리 모팻 리빙스턴이 말라리아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25]

모잠비크 추팡가에 있는 리빙스턴의 아내 메리 모팻 리빙스턴의 무덤. 그녀는 1862년에 사망했다.


리빙스턴은 루부마 강을 탐사했지만, 탐험대 내부에서는 리빙스턴의 리더십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의사 존 커크는 "리빙스턴 박사는 미쳤고 매우 위험한 지도자라는 결론 외에는 내릴 수 없다"고 기록했다. 1863년, 리빙스턴은 머치슨 폭포까지 탐험을 이어갔지만, 영국 정부의 탐험 중단 명령을 받고 1864년 탐험을 종료했다.[23]

잠베지 탐험은 당시 많은 신문에서 실패로 비난받았고, 리빙스턴은 이후 탐험 자금을 모으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존 커크, 찰스 멜러, 리처드 손튼 등의 과학자들은 영국 과학 기관에 방대한 양의 과학적 자료를 제공했다. 귀국후 1865년 두 번째 저서인 『잠베지 강과 그 지류 (The Zambesi and Its Tributaries)』를 저술하여 아프리카 노예 무역의 실상을 폭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3. 3. 3차 탐험 (1866-1873)

1866년 1월, 리빙스턴은 나일 강의 발원지를 찾기 위해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와 잔지바르에서 탐험을 시작했다.[27] 리처드 프랜시스 버튼, 존 해닝 스피크, 새뮤얼 베이커 등이 알베르트 호 또는 빅토리아 호를 나일 강의 발원지로 확인했지만, 리빙스턴은 발원지가 더 남쪽에 있다고 믿었다.[27] 그는 해방된 노예, 코모로 섬 주민, 12명의 시파이 병사, 그리고 이전 탐험 동료였던 추마와 수시로 탐험대를 꾸렸다.[27]

탄자니아 남부 미킨다니에 있는 이 집은 리빙스턴의 마지막 탐험의 시작점이었습니다. 그는 1866년 3월 24일부터 4월 7일까지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봄베이를 거쳐 1866년 1월 16일 잔지바르(현 탄자니아)에 도착했다. 3월 22일에는 루부마 강 하구에 도착하고, 4월 4일에는 내륙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각지에서 모인 짐꾼이 36명이었지만, 이탈자가 속출하여 최종적으로는 4, 5명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고된 여정이었다. 리빙스턴은 루부마 강 어귀에서 출발했지만, 조수들이 점차 그를 버리기 시작했다. 코모로 섬 주민들은 잔지바르로 돌아가 리빙스턴이 죽었다는 거짓 정보를 알렸다.[27] 그는 8월 6일에 말라위 호에 도착했는데, 그때까지 대부분의 보급품과 약품이 도난당했다.[27] 리빙스턴은 말라위 호수를 경유하여 탕가니카 호 남쪽을 목표로 북북동쪽으로 계속 진군했지만, 가는 곳마다 노예상인들의 방해를 받았다. 그들에게 매수된 짐꾼은 리빙스턴이 암살되었다고 허위 보고를 하고, 리빙스턴의 의료 도구 일체가 들어있는 가방을 훔쳐갔다고 전해진다.

리빙스턴은 건강이 악화된 채 탕가니카 호 방향으로 늪지대를 지나 여행했다. 그는 잔지바르에 메시지를 보내 우지지로 보급품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서쪽으로 향했다. 건강이 악화되어 노예 상인들과 함께 여행해야 했다.[27] 1867년 11월 8일, 므웨루 호에 도착했고, 남쪽으로 계속 여행하여 방웨울루 호를 본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루알라바 강을 발견한 리빙스턴은 그것이 나일 강의 상류일 수 있다고 추측했지만, 콩고 강의 상류로 흘러들어간다는 것을 깨달았다.[27] 1867년에는 고난 끝에 탕가니카 호수에 도착하여 므웨루 호를 발견하고, 이듬해 1월 18일에는 방웨울 호를 발견했지만, 기아와 건강 악화로 고통받아 일단 탕가니카 호숫가 마을 우지지로 돌아가게 되었다.

1869년, 리빙스턴은 정글에서 극도로 병든 채로 아랍 상인들에게 구조되어 약을 받고 아랍 전초기지로 옮겨졌다.[27] 1869년 3월, 폐렴을 앓았고, 우지지에 도착했지만 보급품이 도난당한 것을 알게 되었다. 콜레라에 걸리고 발에 열대성 궤양이 생겨 다시 노예 상인들에게 의지하여 밤바라까지 가야 했다. 보급품이 없던 리빙스턴은 음식을 얻기 위해 지역 주민들의 오락을 위해 로프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식사를 해야 했다.[27] 1869년 7월부터 1871년 10월까지는 요양을 하면서 우지지 근처 탐험에 전념하고, 선교와 설교를 자주 했다.

1871년 7월 15일,[28] 리빙스턴은 루알라바 강 강둑의 냥웨 시장에서 아랍 노예 상인들이 약 400명의 아프리카인들을 학살하는 것을 목격했다.[29] 1871년 3월 29일에는 루알라바 강(:en:Lualaba) 강변에서 1,500명이나 되는 노예들이 학살되는 현장을 우연히 목격했다. 이것은 리빙스턴이 실제로 목격한 것 중 최악의 상황이었고, 노예 해방을 위해 일어서려고 했지만, 힘이 남아 있지 않아 우지지에서 요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학살은 리빙스턴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나일 강의 발원지를 찾는 임무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뜨렸다.[29] 우기가 끝난 후, 그는 냥웨에서 탕가니카 호 동쪽 해안의 아랍 정착지인 우지지까지 약 386 km를 여행했는데, 대부분의 시간 동안 심하게 아팠고, 1871년 10월 23일에 도착했다.[31]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만남은 잔지바르 술탄국(Sultanate of Zanzibar)의 아랍 무역항인 우지지(Ujiji)에서 이루어졌으며, 지도 왼쪽 하단 분홍색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헨리 모튼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가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을 만나는 모습


탄자니아 우지지(Ujiji)에 있는 리빙스턴 기념비


이 사이 영국에서는 소식이 끊기고 사망설까지 흘러나오면서 리빙스턴을 탐색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험난한 여정과 현지 방해로 인해 계속 실패했다. 리빙스턴은 6년 동안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었고, 생애 마지막 4년 동안 대부분을 병으로 보냈다. 그의 44통의 편지 중 단 한 통만 잔지바르(Zanzibar)에 도착했다.[33] 호레이스 월러(Horace Waller)에게 보낸 편지에는 "저는 끔찍하게 지쳐 있습니다... 다시 당신을 볼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33][34]

1869년 10월, 『뉴욕 헤럴드』의 경영자인 제임스 고든 베넷 주니어는 유럽 체류 중 특파원 중 한 명인 헨리 스탠리에게 전보를 보내 리빙스턴 수색을 의뢰했다. 스탠리는 1871년 11월 10일 탕가니카 호(Lake Tanganyika) 연안의 우지지(Ujiji) 마을에서 리빙스턴을 발견했으며,[45] 이때 "'''리빙스턴 박사님, 틀림없이 당신이시죠?'''(Dr. Livingstone, I presume?)"라고 인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5] 리빙스턴은 "네"라고 대답하고 "여기서 당신을 맞이하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스탠리는 우지지 근처에서 리빙스턴의 종자와 조우하여 종자의 안내로 본인과 대면했다. 해골처럼 야위어진 모습을 보고 스탠리가 발한 "'''리빙스턴 박사님이시죠?'''(Dr. Livingstone, I presume?)"는 나중에 영국에서 예상치 못한 만남을 표현하는 관용구로 사용될 정도로 극적인 에피소드로 전해졌다. 이 유명한 말은 스탠리가 자신의 일지에서 이 만남에 대한 페이지를 찢어버렸기 때문에 날조일 가능성이 있다.[35]

두 사람은 탕가니카 북단까지 탐험을 하는 등 4개월을 함께 보냈다. 스탠리는 리빙스턴에게 귀국을 강력히 권했지만, 리빙스턴은 나일 강의 발원지를 찾기 위해 더욱 탐험을 계속하고 싶어했다. 스탠리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리빙스턴은 자신의 임무가 완료될 때까지 아프리카를 떠날 결심을 하지 않았다. 그의 병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생애 말년에는 판단력이 떨어졌다. 그는 루알라바 강을 탐험했고, 나일 강과의 연결을 찾지 못한 채 방웨울루 호(Lake Bangweulu)와 늪지대로 돌아가 북쪽으로 흐르는 강을 탐색했다.[27]

스탠리는 1872년 3월 15일 영국으로 향해 떠나 5개월 후 리빙스턴에게 57명의 종자와 충분한 물자를 보냈다. 8월 15일 리빙스턴 일행은 방웨울 호수로 향해 출발하여 이듬해 4월 29일에는 방웨울 호수 남쪽 마을 치탄보에 도착했다. 그러나 일기장에 탐험 기록을 적을 여력도 없이 1873년 5월 1일, 말라리아 합병증으로 숨을 거두었다.



리빙스턴은 현재 잠비아의 방웨울루 호 남동쪽 치푼두에 있는 치탐보 추장의 마을에서 말라리아와 이질로 인한 내부 출혈로 사망했다. 그의 종자들은 깊은 슬픔에 잠겼지만, 그의 남긴 일기, 자료, 휴대품 등을 방수 상자에 담아 그의 시체에 간단한 방부 처리를 하고 잔지바르로 운반했다. 충직한 수행원 추마와 수시의 지휘 아래, 그의 탐험대는 장례식을 치렀다. 그들은 그의 심장을 꺼내 그가 죽은 자리 근처 나무 밑에 묻었다. 이 나무는 무브라 나무 또는 바오밥나무로 다양하게 알려져 있지만, 음푼두 나무일 가능성이 더 높다.[41] 현재 리빙스턴 기념관[42]으로 알려진 그 장소에는 추마와 수시가 보고하고 기록한 사망일인 5월 4일이 적혀 있지만, 대부분의 자료는 리빙스턴의 마지막 일기장 기록일인 5월 1일을 정확한 날짜로 간주한다.[27]

추마와 수시가 이끄는 탐험대는 그의 마지막 일기와 소지품과 함께 그의 유해를 63일 동안 운반하여 약 1609 km 거리의 해안 도시 바가모요로 이동했다. 이 대상은 영국 탐험가 버니 러벳 캐머런의 탐험대와 만났고, 캐머런은 행군을 계속하여 1874년 2월 우지지에 도착하여 리빙스턴의 서류를 찾아 영국으로 보냈다.[27] 79명의 추종자가 여정을 마쳤고, 사람들은 임금을 받았으며, 리빙스턴의 유해는 배로 영국으로 돌아와 매장되었다. 시체는 잔지바르에서 매장될 뻔했지만, 고향인 영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종자가 주장했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 영국으로 운반되었다. 1874년 4월 18일, 무사히 영국에 도착한 시체는 왼팔의 흉터로 확인된 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되었다.[6][43][44] 리빙스턴이 남긴 자료와 일기는 그의 친구에 의해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중앙 아프리카에서의 마지막 일기(Last Journals of David Livingstone in Central Africa)』로 편찬되어 출판되었다.

참고로, 이 책은 외교관으로 뉴욕 등에 체류하고 인도네시아 총영사를 지낸 아네하 준페이에 의해 메이지 41년, 내외출판협회에서 『리빙스턴 언행록』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1851년~1873년 탐험 루트 (적색선)


리빙스턴의 아프리카 대륙 이동은 수만 마일로 추정되며, 그의 일생 동안 남북으로는 적도 근처에서 케이프타운까지, 동서로는 인도양에서 남대서양까지 여행했다. 그가 이루지 못한 나일 강 발원지 탐구는 그의 의지를 이은 스탠리에 의해 루웬조리 산맥에 있는 발원지가 발견됨으로써 19세기 논쟁에 거의 종지부를 찍었다.

4. 노예 무역 반대 운동

아랍 노예상과 그들의 포로들


David Livingstone영어아프리카 대호수 지역을 여행하면서 아랍 노예상들에게 강제로 행군하는 노예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이를 널리 알려 노예 제도 폐지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불러일으켰다.[1] 그는 ''뉴욕 헤럴드'' 편집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약 제가 밝히는 우지지의 끔찍한 노예제도에 대한 내용이 동부 해안 노예 무역의 억압으로 이어진다면, 저는 그것을 나일강의 모든 원류를 발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로 여길 것입니다."라고 언급하며 노예 무역의 참상을 폭로하는 데 헌신했다.[45]

리빙스턴은 일지에서 "그 악행을 과장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기록하며, 노예들이 겪는 끔찍한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는 길에 버려진 채 죽어가는 노예들, 굶주림으로 죽은 남자, 주인에게 버려진 어린 노예들, 그리고 '낙담'이라는 병으로 고통받는 자유인 출신 노예들의 모습을 기록했다.[62] 리빙스턴은 노예 무역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의 수가 시장에 도착하는 노예 수보다 훨씬 많다고 추정하며, "쿠바와 다른 곳의 '친절한 주인'들에게 도착한 사람은 5명 중 1명도 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46]

리빙스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예 상인들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그는 동료들을 잘 이끌지 못했고, 독립적인 탐험가들의 잔혹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예를 소유하고 거래한 무역상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리빙스턴의 노예에 대한 수치는 과장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47][48]

4. 1. 노예 무역의 참상 목격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대호수 지역을 탐험하면서 아랍 노예상들에게 강제로 끌려가는 노예들의 참혹한 행렬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45] 그는 노예 무역의 실상에 대해 "그 악행을 과장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기록하며, 노예들이 겪는 끔찍한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45]

길에서 총이나 칼에 찔려 죽은 채 버려진 노예,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노예, 너무 약해져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린 노예들의 모습은 리빙스턴에게 깊은 슬픔과 분노를 안겨주었다.[45] 그는 또한 붙잡힌 자유인들이 겪는 '낙담'이라는 병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해방된 노예들조차 쇠사슬에 묶여 며칠 만에 죽어가는 비극적인 현실을 폭로했다.[45]

리빙스턴은 노예 무역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들의 수가 시장에 도착하는 노예 수보다 훨씬 많다고 추정했다. 그는 "쿠바와 다른 곳의 '친절한 주인'들에게 도착한 사람은 5명 중 1명도 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며, 노예 소유주들의 위선을 비판했다.[46]

리빙스턴의 편지, 책, 일지는 노예 제도 폐지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불러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1] 그러나 그는 노예 상인들의 도움에 의존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그는 동료들을 잘 이끌지 못했고, 마지막 탐험에서는 전문적인 지원 없이 개인적인 탐험가로 남게 되었다. 그는 스탠리와 같은 탐험가들의 잔혹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노예를 소유하고 거래한 무역상인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했다. 리빙스턴은 우지지에서 보내진 짐꾼들 중 일부가 노예라는 사실을 알고 격분했지만,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45]

하지만 리빙스턴의 노예에 대한 수치는 과장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47][48]

4. 2. 노예 무역 반대 캠페인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대호수 지역을 여행하면서 아랍 노예상들에게 강제로 끌려가는 노예들의 참혹한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45] 그는 노예 무역의 실상을 "그 악행을 과장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표현하며,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노예들의 참상을 기록했다.[45]

리빙스턴은 노예 무역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들의 수가 시장에 도착하는 노예의 수보다 훨씬 많다고 추정했다. 그는 "쿠바와 다른 곳의 '친절한 주인'들에게 도착한 사람은 5명 중 1명도 되지 않는다"고 언급하며,[46] 노예 소유주들의 성경 해석을 비판했다. 리빙스턴의 편지, 책, 일지[1]는 노예 제도 폐지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불러일으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리빙스턴은 노예 상인들의 도움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그는 동료들을 잘 이끌지 못했고, 마지막 탐험에서는 전문적인 지원 없이 개인적인 탐험가로 남게 되었다.[47][48] 그는 노예를 소유하고 거래한 무역상인 무하마드 보가리브와 무하마드 빈 살레( "엠파마리"로도 알려짐)로부터 도움을 받았으며,[47][48] 우지지에서 보내진 짐꾼들 중 일부가 노예라는 사실에 격분하기도 했다.

4. 3. 국제적인 영향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대호수 지역을 여행하면서 아랍 노예상들에게 강제로 행군하는 노예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이를 널리 알려 노예 제도 폐지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불러일으켰다.[1] 그는 ''뉴욕 헤럴드'' 편집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약 제가 밝히는 우지지의 끔찍한 노예제도에 대한 내용이 동부 해안 노예 무역의 억압으로 이어진다면, 저는 그것을 나일강의 모든 원류를 발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로 여길 것입니다."라고 언급하며 노예 무역의 참상을 폭로하는 데 헌신했다.[45]

리빙스턴은 일지에서 "그 악행을 과장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기록하며, 노예들이 겪는 끔찍한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는 길에 버려진 채 죽어가는 노예들, 굶주림으로 죽은 남자, 주인에게 버려진 어린 노예들, 그리고 '낙담'이라는 병으로 고통받는 자유인 출신 노예들의 모습을 기록했다.[62] 리빙스턴은 노예 무역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의 수가 시장에 도착하는 노예 수보다 훨씬 많다고 추정하며, "쿠바와 다른 곳의 '친절한 주인'들에게 도착한 사람은 5명 중 1명도 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46]

리빙스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예 상인들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그는 동료들을 잘 이끌지 못했고, 독립적인 탐험가들의 잔혹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예를 소유하고 거래한 무역상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리빙스턴의 노예에 대한 수치는 과장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47][48]

5. 리빙스턴의 유산

1860년대 후반, 리빙스턴의 명성은 그가 설립한 선교 사업과 잠베지 탐험의 실패, 그리고 나일강 발원지에 대한 그의 생각이 지지를 받지 못함으로써 유럽에서 실추되었다.[22] 그의 탐험은 질서와 조직의 모범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명성은 스탠리와 그의 신문[22], 그리고 그의 시신을 가지고 긴 여정을 한 리빙스턴의 충성스러운 하인들에 의해 회복되었다. 그들의 헌신적인 여정은 경이로움을 자아냈다. 그의 마지막 일기가 출판되면서 고난 속에서도 굳건한 결의를 보여주었다.[6]

1860년, 그의 요청으로 중앙 아프리카 대학교 선교회(Universities' Mission to Central Africa)가 설립되었다. 리더 스털링(Leader Stirling)과 애니 앨런(Miss Annie Allen)과 같은 많은 중요한 선교사들이 나중에 이 단체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 단체와 그들이 후원한 의료 선교사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49]

리빙스턴은 유럽의 지식을 위한 지리적 발견을 했다. 그는 노예 무역 반대론자, 탐험가, 선교사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아프리카인들을 위한 교육과 의료를 시작한 선교사들과 아프리카 호수 회사(African Lakes Company)의 무역을 위해 중앙 아프리카를 개방했다. 그는 많은 아프리카 족장들과 현지 주민들에게 존경을 받았고, 그의 이름은 그들과 영국 사이의 관계를 원활하게 했다.[6]

리빙스턴 동상, 에든버러(Edinburgh) 작품: 아멜리아 로버트슨 힐(Amelia Robertson Hill)


부분적으로 그 결과로, 그의 사후 50년 이내에 아프리카에 식민 통치가 수립되었고, 백인 정착민들이 내륙으로 더 깊이 진출하도록 장려되었다. 그러나 리빙스턴이 "식민지"에 대해 구상한 것은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식민 통치가 아니라, 노예 제도가 없는 삶의 방식을 찾도록 그들을 돕기 위해 사람들 사이에 살아가는 헌신적인 기독교 유럽인들의 정착촌이었다.[21] 리빙스턴은 19세기 영국에서 복음주의적이고 비국교도적인 운동의 일부였는데, 이 운동은 '열등한 인종'을 지배할 신권에 대한 개념에서 외교 정책에 대한 보다 현대적인 윤리적 사상으로 국가적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50]

블랜타이어(Blantyre)에 있는 데이비드 리빙스턴 센터(David Livingstone Centre)는 그의 삶을 기념하며, 그가 태어난 집이자 그의 직장 생활을 시작한 제분소 부지에 위치해 있다. 그의 기독교 신앙은 그의 일기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그중 한 항목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나는 그리스도의 왕국과 관련이 없는 한, 내가 가지고 있거나 가질 수 있는 어떤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것이 왕국의 이익을 증진시킨다면, 그것을 주거나 보관하는 것만으로 그분의 영광을 증진시킬 수 있다면 그것을 주거나 보관할 것입니다. 저는 시간과 영원 속에서 모든 희망을 그분께 빚지고 있습니다."[51]

1997년 앨빈 오스틴(Alvyn Austin)에 따르면:[52]



탈식민 시대였던 1960년대에 리빙스턴은 폭로되었습니다. 그는 단 한 명의 확실한 개종자를 만들었는데, 그 사람조차 나중에 배교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이미 여행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탐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몇몇 노예들을 해방시켰을 뿐입니다. 그는 동료들을 끔찍하게 대했습니다. 그는 아랍 노예 상인들과 함께 여행했습니다. 그의 가정 생활은 엉망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백인의 짐" 사고방식을 구체화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이름이 바뀌고 동상이 무너지는 시대에 리빙스턴은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세실 로즈(Cecil Rhodes)와 같은 다른 유럽인들에 대한 현대 아프리카인들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리빙스턴은 영웅적인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 로디지아(Rhodesia)는 오래전에 이름을 없앴지만, 리빙스턴(잠비아)과 리빙스토니아(말라위) 도시들은 탐험가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2002년,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영국 전역 투표를 통해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100인(100 Greatest Britons)에 선정되었다.[53]

잠비아 리빙스턴에 있는 기념비


리빙스턴의 아프리카 역사 및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관에 대한 영향은 매우 컸다. 첫째로, 리빙스턴의 첫 번째 아프리카 탐험 이전에는 아프리카는 "암흑대륙"이라는 이름이 보여주듯이 일부를 제외하고는 유럽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고, 고대 로마 시대 알렉산드리아의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로부터 얻은 지식에서 거의 발전이 없었다. 그러나 리빙스턴은 탐험 중에 천문 관측에 의한 측량술을 익혀 거의 정확하게 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 그 지리적 발견은 영국에 편지로 전달됨으로써 유럽 각지에서 아프리카 지도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거기에서 무역 루트가 생겨났다.

리빙스턴이 "개척한" 무역 루트를 가장 많이 이용한 것은 상아 상인이 아니라 노예 상인들이었다. 중앙 아프리카로의 루트가 개척됨으로써 그 지역의 노예 사냥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인도양을 중심으로 한 노예 무역은 오히려 활발해져 잔지바르의 노예 시장은 중앙 아프리카 최대라고 불릴 정도로 성장했다. 저서와 편지에서 여러 차례 포르투갈령이나 술탄에 의해 행해지고 있는 노예 시장의 폐지를 반복해서 호소했기 때문에, 위기감을 느낀 노예 상인에게 탐험 중에 여러 번 방해를 받았고, 때로는 암살당할 뻔하기도 했다. 그의 운동은 1871년 국민으로부터 하원에 대한 요구 제출에 의해 결실을 맺어 몇 달 후 잔지바르의 노예 시장은 폐쇄되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노예 무역은 그 후에도 각지에서 조용히 계속되었고, 나중에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 정치에 개입하는 구실이 되어 열강은 아프리카 분할로 나아가게 된다(en:African slave trade 참조). 열강의 아프리카 진출에 있어서 리빙스턴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이 스탠리이다. 그는 뛰어난 탐험가인 한편,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위탁을 받아 아프리카 각지의 마을의 족장들에게 공물을 주고 콩고 자유국 건국 등에 큰 역할을 했다.

탐험가이면서 결과적으로 유럽의 식민 지배를 위해 노력하게 된 스탠리에 대해 리빙스턴은 자신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제1의 목적은 선교이며, 탐험은 그 거점을 탐색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저서에서 말하고 있다. 그의 공적에 의해 유럽으로부터의 선교사의 유입은 급격히 늘었고, 그의 저서에 자극을 받아 선교사를 지망하는 젊은이도 늘었다고 한다.

잠비아에는 그의 이름을 딴 도시 리빙스턴이 있으며, 지금도 그의 기념비와 그의 자료를 모은 박물관이 있다. 또한, 말라위의 카롱가주의 도시 리빙스토니아도 이 이름에서 유래한다.

5. 1. 지리적 발견

리빙스턴은 나일강에 대해서는 잘못 알고 있었지만, 응가미 호, 말라위 호, 방웨울루 호 등 서구 과학에 수많은 지리적 특징을 밝혀냈다. 그는 탕가니카 호, 므웨루 호의 세부 사항과 특히 상부 잠베지 강을 포함한 많은 강의 흐름을 자세히 조사했으며, 그의 관찰 덕분에 이전에는 공백이었던 광대한 지역을 지도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32]

리빙스턴은 런던의 왕립지리학회로부터 금메달을 수여받았고, 평생 강한 유대감을 가졌던 학회의 펠로우(Fellow)가 되었다.[6] 그의 아프리카 역사 및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관에 대한 영향은 매우 컸다. 리빙스턴의 탐험 이전 아프리카는 "암흑대륙"으로 불렸으며, 고대 로마 시대 프톨레마이오스로부터 얻은 지식에서 거의 발전이 없었다. 그러나 리빙스턴은 탐험 중 천문 관측에 의한 측량술을 익혀 거의 정확하게 지도를 만들었고, 이는 영국에 편지로 전달되어 유럽 각지에서 아프리카 지도가 만들어지고 무역 루트가 생겨나게 했다.

리빙스턴이 개척한 무역 루트는 상아 상인보다 노예 상인들이 많이 이용했다. 중앙 아프리카로의 루트가 개척되면서 노예 사냥이 빈번해졌고, 인도양을 중심으로 한 노예 무역은 활발해져 잔지바르의 노예 시장은 중앙 아프리카 최대 규모로 성장했다. 리빙스턴은 저서와 편지에서 노예 시장 폐지를 호소했고, 이는 1871년 국민으로부터 하원에 대한 요구 제출로 이어져 잔지바르의 노예 시장은 폐쇄되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노예 무역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 정치에 개입하는 구실이 되어 아프리카 분할로 이어졌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위탁을 받아 아프리카 각지에서 콩고 자유국 건국에 큰 역할을 한 스탠리와 달리, 리빙스턴은 선교를 제1의 목적으로, 탐험은 그 거점을 찾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다. 그의 공적으로 유럽 선교사의 유입이 늘었고, 그의 저서에 자극받은 젊은이들이 선교사를 지망하기도 했다.

잠비아에는 그의 이름을 딴 도시 리빙스턴이 있으며, 그의 기념비와 자료를 모은 박물관이 있다. 말라위 카롱가주의 도시 리빙스토니아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5. 2. 선교 활동

1840년 런던 전도 협회의 의료 전도사아프리카에 파견된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로버트 모펫의 영향을 받아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1841년 남아프리카 보츠와나에 도착한 그는 니그로 부락에서 복음 전도와 원주민 문화 연구에 힘썼다. 1849년부터 1856년까지는 칼라하리 사막 횡단, 느가미 호 발견(1849년), 잠베지강 발견(1851년), 빅토리아 폭포 발견(1855년) 등 아프리카 탐험을 통해 지리적 발견에도 기여했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원주민을 존중하고 그들의 신뢰를 얻었지만, 기독교로의 영구적인 개종에는 어려움을 겪었다.[37] 그는 보츠와나의 크웨나족(Kwena people) 족장 세켈레 1세를 개종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세켈레는 리빙스턴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아프리카 전통 문화를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37] 세켈레는 일부다처제를 유지했고, 리빙스턴의 요구로 이혼했던 전처 중 한 명이 임신하면서 리빙스턴은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21]

리빙스턴이 떠난 후에도 세켈레는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며 주변 부족들에게 선교사를 인도하고, 거의 모든 크웨나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등 기독교 전파에 크게 기여했다.[36] 그러나 세켈레는 강우 의식과 일부다처제를 계속 유지했기 때문에, 많은 유럽 선교사들은 그를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36]

1858년 켈리마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영국 대사가 되었으며, 영국 정부의 원조를 얻어 중앙 아프리카 탐험 대장이 된 그는, 6명의 대원을 이끌고 잠베지강 유역을 조사하던 중에 포르투갈 사람들의 노예 매매를 보고 이에 간섭하여 수백명의 노예를 해방시켰다.

5. 3. 식민지화와의 관계

그는 아프리카상인군대가 드나들도록 하여 기독교 선교활동을 쉽게 하겠다는 즉, 아프리카를 영국의 식민지로 만들어 선교사들이 쉽게 드나들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리빙스턴의 탐험으로 발견된 지역은 모두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91] 더구나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사람들을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기독교 전파로 계몽해야 할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여겼다. 물론 이러한 사고는 리빙스턴만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아프리카를 검은 대륙이라고 낮춰 부름으로써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들의 사고방식이었다.[92]

리빙스턴의 아프리카 역사 및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관에 대한 영향은 매우 컸다. 리빙스턴의 첫 번째 아프리카 탐험 이전에는 아프리카는 "암흑대륙"이라는 이름이 보여주듯이 일부를 제외하고는 유럽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고, 고대 로마 시대 알렉산드리아의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로부터 얻은 지식에서 거의 발전이 없었다. 그러나 리빙스턴은 탐험 중에 천문 관측에 의한 측량술을 익혀 거의 정확하게 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 그 지리적 발견은 영국에 편지로 전달됨으로써 유럽 각지에서 아프리카 지도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거기에서 무역 루트가 생겨났다.

리빙스턴이 "개척한" 무역 루트를 가장 많이 이용한 것은 상아 상인이 아니라 노예 상인들이었다. 중앙 아프리카로의 루트가 개척됨으로써 그 지역의 노예 사냥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인도양을 중심으로 한 노예 무역은 오히려 활발해져 잔지바르의 노예 시장은 중앙 아프리카 최대라고 불릴 정도로 성장했다. 저서와 편지에서 여러 차례 포르투갈령이나 술탄에 의해 행해지고 있는 노예 시장의 폐지를 반복해서 호소했기 때문에, 위기감을 느낀 노예 상인에게 탐험 중에 여러 번 방해를 받았고, 때로는 암살당할 뻔하기도 했다. 그의 운동은 1871년 국민으로부터 하원에 대한 요구 제출에 의해 결실을 맺어 몇 달 후 잔지바르의 노예 시장은 폐쇄되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노예 무역은 그 후에도 각지에서 조용히 계속되었고, 나중에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 정치에 개입하는 구실이 되어 열강은 아프리카 분할로 나아가게 된다. 열강의 아프리카 진출에 있어서 리빙스턴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이 스탠리이다. 그는 뛰어난 탐험가인 한편,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위탁을 받아 아프리카 각지의 마을의 족장들에게 공물을 주고 콩고 자유국 건국 등에 큰 역할을 했다.

탐험가이면서 결과적으로 유럽의 식민 지배를 위해 노력하게 된 스탠리에 대해 리빙스턴은 자신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제1의 목적은 선교이며, 탐험은 그 거점을 탐색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저서에서 말하고 있다. 그의 공적에 의해 유럽으로부터의 선교사의 유입은 급격히 늘었고, 그의 저서에 자극을 받아 선교사를 지망하는 젊은이도 늘었다고 한다.

잠비아에는 그의 이름을 딴 도시 리빙스턴이 있으며, 지금도 그의 기념비와 그의 자료를 모은 박물관이 있다. 또한, 말라위의 카롱가주의 도시 리빙스토니아도 이 이름에서 유래한다.

5. 4. 현대적 평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19세기 영국의 탐험가이자 선교사로, 아프리카 내륙 탐험과 노예 무역 반대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6] 그는 아프리카를 상인군대가 드나들도록 하여 기독교 선교활동을 쉽게 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며,[91] 실제로 그의 탐험으로 발견된 지역은 모두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91] 그러나 그는 아프리카인들을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계몽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는데, 이는 당시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이었다.[92]

1860년대 후반, 리빙스턴의 명성은 선교 사업과 잠베지 탐험의 실패, 나일강 발원지에 대한 그의 생각에 대한 지지 부족으로 인해 실추되기도 했다.[22] 하지만 그의 충성스러운 하인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그의 마지막 일기가 출판되면서, 고난 속에서도 굳건한 그의 결의가 알려져 명성이 회복되었다.[6]

리빙스턴은 유럽의 지식을 위한 지리적 발견을 했고, 노예 무역 반대론자, 탐험가, 선교사들에게 영감을 주었다.[6] 그는 아프리카인들을 위한 교육과 의료를 시작한 선교사들과 아프리카 호수 회사(African Lakes Company)의 무역을 위해 중앙 아프리카를 개방했으며, 많은 아프리카 족장들과 현지 주민들에게 존경을 받았다.[6] 그의 요청으로 중앙 아프리카 대학교 선교회(Universities' Mission to Central Africa)가 설립되어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49]

그의 사후, 아프리카에 식민 통치가 수립되었지만, 리빙스턴이 구상한 "식민지"는 노예 제도가 없는 삶의 방식을 돕기 위한 헌신적인 기독교 유럽인들의 정착촌이었다.[21] 그는 19세기 영국에서 복음주의적이고 비국교도적인 운동의 일부였으며, 이는 '열등한 인종'을 지배할 신권에 대한 개념에서 외교 정책에 대한 보다 현대적인 윤리적 사상으로 국가적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50]

리빙스턴의 기독교 신앙은 그의 일기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나는 그리스도의 왕국과 관련이 없는 한, 내가 가지고 있거나 가질 수 있는 어떤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라고 적혀있다.[51]

1960년대 탈식민 시대에 리빙스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영웅적인 전설로 남아있다.[52] 로디지아(Rhodesia)는 이름을 없앴지만, 잠비아의 리빙스턴과 말라위의 리빙스토니아는 그의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52] 2002년, 그는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100인(100 Greatest Britons)에 선정되었다.[53]

리빙스턴의 아프리카 역사 및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관에 대한 영향은 매우 컸다. 그의 탐험 이전에는 아프리카는 "암흑대륙"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리빙스턴은 천문 관측에 의한 측량술을 익혀 정확한 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 이 지리적 발견은 유럽에서 아프리카 지도를 만들고 무역 루트를 개척하는 데 기여했다.

리빙스턴이 개척한 무역 루트는 상아 상인뿐 아니라 노예 상인들도 이용했다. 중앙 아프리카로의 루트가 개척되면서 노예 사냥이 빈번해졌고, 인도양을 중심으로 한 노예 무역이 활발해졌다. 리빙스턴은 노예 시장 폐지를 호소하여, 잔지바르의 노예 시장 폐쇄에 기여했다.

리빙스턴은 탐험가였지만, 결과적으로 유럽의 식민 지배를 위해 노력하게 된 스탠리와는 달리, 자신은 선교가 제1의 목적이며 탐험은 그 수단이라고 말했다. 그의 공적으로 유럽으로부터의 선교사 유입이 늘었고, 그의 저서에 자극을 받아 선교사를 지망하는 젊은이도 늘었다고 한다. 잠비아에는 그의 이름을 딴 도시 리빙스턴이 있으며, 그의 기념비와 자료를 모은 박물관이 있다. 말라위의 리빙스토니아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6. 리빙스턴과 한국

일제강점기 대한민국개신교인들은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영웅적인 선교 모델로 인식했다. 그의 저서는 한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 1919년에는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郎일본어·모리모토 고키치/森本厚吉일본어의 『리빙스턴 전』이 경성사서점에서 출판되었고, 1930년에는 구로다 시로/黒田四郎일본어의 『암흑 아프리카의 성자 리빙스턴』이 교문관에서 출판되었다. 1934년에는 마사이케 히토시/政池仁일본어의 『리빙스턴 전』이 기독교출판사에서, W.G. 브레이크의 『리빙스턴의 생애』(구로가미 겐조/畔上賢造일본어·후지모토 마사타카/藤本正高일본어 역)가 향산당서방에서 출판되는 등 리빙스턴의 생애와 사역에 관한 책들이 한국에서 출판되어 그의 헌신적인 삶이 한국 개신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정신을 이어받아, 한국 교회와 여러 선교 단체들은 아프리카에서 선교 및 봉사 활동에 헌신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기리는 다양한 기념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의 탐험 정신과 인도주의적 활동은 한국 사회에 깊은 영감을 주었으며, 여러 출판물을 통해 그의 생애와 업적이 소개되었다. 1919년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郎일본어·모리모토 고키치/森本厚吉일본어의 『리빙스턴 전』이 경성사서점에서 출간되었고, 1930년에는 구로다 시로/黒田四郎일본어의 『암흑 아프리카의 성자 리빙스턴』이 교문관에서 출판되었다. 1934년에는 마사이케 히토시/政池仁일본어의 『리빙스턴 전』, W.G. 브레이크의 『리빙스턴의 생애』(구로가미 겐조/畔上賢造일본어·후지모토 마사타카/藤本正高일본어 역)가 각각 기독교출판사와 향산당서방에서 출간되었다.

6. 1. 한국 개신교 선교의 영향

일제강점기 대한민국개신교인들은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영웅적인 선교 모델로 인식했다. 그의 저서는 한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 1919년에는 有島武郎(아리시마 다케오)·森本厚吉(모리모토 고키치)의 『리빙스턴 전』이 경성사서점에서 출판되었고, 1930년에는 黒田四郎(구로다 시로)의 『암흑 아프리카의 성자 리빙스턴』이 교문관에서 출판되었다. 1934년에는 政池仁(마사이케 히토시)의 『리빙스턴 전』이 기독교출판사에서, W.G. 브레이크의 『리빙스턴의 생애』(畔上賢造·藤本正高 역)가 향산당서방에서 출판되는 등 리빙스턴의 생애와 사역에 관한 책들이 한국에서 출판되어 그의 헌신적인 삶이 한국 개신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6. 2. 한국 교회의 아프리카 선교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정신을 이어받아, 한국 교회와 여러 선교 단체들은 아프리카에서 선교 및 봉사 활동에 헌신하고 있다.

6. 3. 리빙스턴 기념 사업

한국에서는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기리는 다양한 기념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의 탐험 정신과 인도주의적 활동은 한국 사회에 깊은 영감을 주었으며, 여러 출판물을 통해 그의 생애와 업적이 소개되었다. 1919년 有島武郎·森本厚吉의 『리빙스턴 전』이 경성사서점에서 출간되었고, 1930년에는 黒田四郎의 『암흑 아프리카의 성자 리빙스턴』이 교문관에서 출판되었다. 1934년에는 政池仁의 『리빙스턴 전』, W.G. 브레이크의 『리빙스턴의 생애』(畔上賢造·藤本正高 역)가 각각 기독교출판사와 향산당서방에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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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학술지 Unveiling of the Livingstone Statue
[82] 웹사이트 Livingstone Healthservice http://www.accc-ja.c[...]
[83] 웹사이트 Clydesdale 10 Pounds, 1982 http://aes.iupui.edu[...] Ron Wise's Banknoteworld
[84] 웹사이트 Clydesdale 10 Pounds, 1990 http://aes.iupui.edu[...] Ron Wise's Banknoteworld
[85] 학술지 On livingstonite, a new mineral 1874
[86] 영화 Forbidden Territory: Stanley's Search for Livingstone (1997)
[87] 서적 Marvel Masterworks: Young Allies Marvel Publishing
[88] 서적 The Complete ABBA https://books.google[...] Titan Books 2012
[89] 웹사이트 Achievements https://www.ign.com/[...] IGN 2013-07-10
[90] 웹사이트 #추정.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18세기 영국 성공회 복음주의자들의 해외선교 선교회
[91] 기타 #추정.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잠베지강 유역 등
[92] 서적 에세이 세계사 백산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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